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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물
송곳의 최규석 작가(1) 본문
최규석작가 인터뷰
일시: 2016.4.11
이-이종명/ 최-최규석 작가
이 : 지난번 사무실에 찾아 오셨을 때 처음 뵙게 되었는데, 그리고 나서 어떤 분인가 검색을 해보니까 정말 많이 뜨더라구요. 만화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100도씨는 주셔서 읽어봤고, 다른 것은 안보다가 오늘 여기 와야 해서 한권 사서봤어요. ‘대한민국 원주민’ 제가 알고 있던 거랑 너무 똑 같아서 재미있었어요. 여기서보면 77년 태어나 가난시골에서 생활했던 것 같은데 본인이 느끼기에는 얼마나 가난했는지 궁금해요.
최 : 글쎄요. 제가 가난을 그렇게 강조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 시절 시골이라면 다들 가난하닌까. 시골에 살았는데 소유의 땅이 없었던 집이었어요. 밥을 며칠씩 굶었다던지 그런 것은 없었어요. 77년 생이니까 밀가루나 이런 것들이 지급되고 그래서 굶고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아요. 옛날 사람들 생각에는 밥만 먹어도 된다는 생각이 있었잖아요.
이 :만화나 글들을 보면 사회비판적이기도 하고 정의를 외치기도하고 어찌보면 까칠한 듯한 이런 느낌이 있고 김제동의 톡투유에서 보니까 머리 짧게하고 나오셔가지고서 발가락은 까딱까딱하면서 그걸로 저항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원래 깐깐하고 까치했던 건지, 언제부터 이런 생각이 있었던 건지
최: 어릴적에는 생각이 정말 많았던 편이었던 것 같아요. 어릴 적에는 친구들과 노는 것 보다는 혼자 생각한는 것을 즐기는 아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납득이 되지 않고 이해가 도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는 그런게 좀 심했었어요.
이: 예를 들면 어떤게 납득이 되지 않는 거지요?
최 : 가령 남자아이들 끼리 있으면 싸움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친구랑 친구가 아닌 애가 싸움이 붙어도 친구 편을 들지 않고 싸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하다보닌 친구랑 다툼도 있었구요.
이 : 마을에서 보면 형제들과 다른 친구들과 싸움이 붙으면 형제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친구를 혼내주는 그런 경우도 많았잖아요.
최 : 우리집은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저도 그런 기억이 있었는데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나 이럴 때 유치원 다니던 아이들과 싸움이 나면은 대부분 옛날 사람들이 지고 오면은 아빠가 때리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애들이 안질려고 칼도 막 들고 나오고...... 어릴적에는 그냥 무섭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끔찍한 거죠. 여섯 살짜리 이런 애들이 싸움을 하다가 불리해지면 집에 들어가서 부엌 칼을 들고오는 그러면 뛰어서 도망치고 그랬던 기억이 있어요. 어렸을 적에 부모님들은 차라리 지라는 말을 많이 하셨던 것 같아요. 사람 헤치지 마라.
이 : 어릴 적에도 키가 크고 덩치가 좋았나요?
최 : 음~ 덩치가 좋았던 시절도 있고 안좋았던 시기도 있고, 거의 항상 큰 편이었고요. 초등학교 1학년 때는 제일 큰 편이었어요.
이 : ‘대한민국 원주민’에서 보면 다섯 살에 입학한 내용이 나오잖아요.
최 : 입한 한 게 아니고 그냥 누나를 따라 간거죠. 엄마는장사를 나가야 하고 집에서 봐줄 사람이 없으니까. 원래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누나를 나를 봐줬엇는데 누나가 입학을 해버렸잔하요. 봐줄 사람이 없으니까 누나에 딸려 보낸거죠.
이 : 막내 누나랑 세 살 터울 인건가요?
최 : 그렇죠.
이 : 얼마나 그렇게 누나를 따라 학교에 다닌 거예요?
최 : 몇 달 다닌 것 같아요. 몇 달 다녔는데 선생님도 내보내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고 마침 1학년짜리 남자애랑 싸움이 나가지고 시끄러워지닌까 나오지 말라고
이 : 그러고 나서는 집에서 혼자 있었어요?
최 : 엄마가 나오지 말라고 집에 가둬놓고 일을 나갈려고 시도도하고 나이는 먹었지만 학교에 안다니는 아이들이 있잖아요. 그런 아이들이 봐주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이 : 시골에 댐이 만들어져 시골을 떠나는 것으로 되어 있던데 몇 살 때에요?
최 : 그게 초등학교 1학년 마치고,
이 : 댐 이름이 뭐예요?
최 : 남강댐이었나.
이 : 남강댐. 그러면 바로 옆 마을로 이사간 건가요, 아니요 도시로 확 들어와버린 건가요?
최 : 땅이 있는 사람들은 이주단지가 생기잖아요. 그러다보니 이주단지로 넘어갔는데, 어차피 우리는 땅이 없다보니까 굳이 붙어있을 이유도 없고 누나나 형도 창원, 마창 쪽에 일을 하니까 그쪽으로 가는 게 났겠다 싶어 창원으로 이주를 했죠.
이 : 그러면 중고등학교를 창원에서 다니신 건가요?
최 : 네. 창원이 고향이라고 봐야죠.
이 : 중고등학교 때에도 만화를 잘 그렸다고 하던데 그것은 스스로 그려 본건가요? 독학하면서.
최 : 그렇죠.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는 아이들은 많이 그리잖아요. 많이 그리다가 점점 숫자가 줄어들죠. 공부도 해야하고 하니까. 끝까지 남은 인간 중에 하나인거죠.
이 : 참, 반장은 지금 뭐해요? 만화학과 가라고 권유했다던.
최 : 국책기관에서 일하는 것을 알고 있어요.
이 : 가끔 만나요?
최 : 네~ 통화는 아주 가끔하고 있어요.
이 : 만화보면서 이분이 참 좋은 권유를 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습지생태보고서를 보면 대학 자취하는 내용이잖아요. 여기서 보면 군대가서 187번 훈련병이었다고 하던데 군대 이야기 좀 들을 수 있을까요?
최 : ‘대한민국 원주민’이야기는 아버님 이야기죠. 아버님이 철책을 끊어서 술을 사드신. 하하하~
이 : 그럼 커밍아웃 할 게 좀 있으세요?
최 : 저는 헌병이었는데요, 일단 군생활이 대개 잘 맞았어요. 훈련받고 그러니까 군대의 본래의 임무, 국방이라는 임무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과 관련된 활동들은 다 좋아했어요. 총쏘는 것도 좋아하고 훈련받는 것도 좋아하고 행군도 좋아하고.
이 : 사람관계가 제일 힘들잖아요.
최 : 내무실 안에 친구들이랑 지내는 것도 다 좋았어요. 친한 군인들이 2년동안 소풍 온 것 같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간부들과의 관계는 별로 좋지 않았고 불합리한 것을 강요하고 이런 것들 때문에 대개 힘들었었죠. 더군다나 헌병이다 보니 영창에 근무를 들어가잖아요. 영창에 근무를 들어가면 반말을 해요. 수감자들에게. 이것도 납득이 안되는 거예요. 일단 미결수 들이 잖아요. 또 기결이라 하더라도 어쨌던 죄를 지운 것은 국가와의 관계인 거고 나랑은 별개잖아요. 나는 그냥 도망 못가게 지키는 사람이고. 벌을 받더라도 인간적인 존중은 해야하는데 당연히 반말을 쓰도록 하는 거죠. 그런데서 오는 불편함.
또 전역을 한 간부가 주말마다 와서 일을 시키는 거예요.
이 : 그런 경우도 있나요?
최 : 담당간부인 분이 대위로 전역을 했는데 부인이 대학교로 강의를 나가시는 분이 었어요. 간호학과인가 그랬어요. 이분이 교안을 만들잖아요. 다 영어예요. 의학용어들이니까. 그걸 가지고 와서 타이핑 하라고 하는 거죠.
초등학교 남강땜. 땅이 있는 사람들은 이주단지로 넘어갔는데. 우리 집은 땅이 없다보니 붙어 있을 이유가 없고 누가 형도 창원 공단에 다니고 했으니 창원으로 올거져
만화를 잘 그렸다고 하던데 그때는 독학으로 한건가요. 그것도 양이 굉장히 많아요. 한글이면 그래도 하겠는데 영어고 그것도 아는 단어도 아니니까 일일이 보고 쳐야 하잖아요. 그런 것을 주말마다 와서 시키는데 소대장, 분대장이 다 알아요. 아는데도 막지를 못하는 거죠.
이 : 작가님이 그래서 그걸 다했어요?
최 : 어쩔수가 없어요.
이 : 아니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는 것처럼 단어를 틀리게 해서 난처하게 만든 다는가.
최 : 허허허. 그런거는 어떻게 빠져나갈 방법이 없더라구요. 신고를 하지 않는 이상 방법이 없는 거죠. 신고를 하면은 내 군생활이 빡빡해질 것 같고.
이 : 저는 방위였는데 방위들은 들어가기 전에 술을 사가지고 울타리 밖에 몰래 숨겨 놓고 헌병들에게 한병주고 나머지는 저희가 몰래 먹었거든요. 그러면 헌병이 이상병님은 자기를 공범으로 만들어 신고도 못하게 한다면서... 그런 헌병도 있었는데 헌병 출신이셨군요.
최 : 저는 개인적으로 군대가 제에게 끼친 좋은 영향은 많다고 봐요. 그 전에는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는 그러니까 재수없는 인간 그런 부류였어요. 가령 학교 다닐 때 동기들이 후배들을 모아놓고 기합을 준다거나 하면 혼자서 동기들과 싸우는 거죠. 그러다보니 동기들과 반년 정도 인사도 안하고 지내는 경우도 있어어요. 저는 그런데서 느끼는 우월감이 굉장히 컸어요. 저는 훌륭한 사람들이고 저사람들은 아직 개화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에서 오는 쾌감이 저에게는 굉장히 컸던 것 같아요.
이 : 자기만족, 자기 우월감이 좀 있었던 거네요?
최 : 네. 그런데 군대가서는 그러지 못했던게 굉장히 많았죠. 직속 자기 후배를 괴롭히는 고참을 위협한 적은 있었어요. 어쨌던 내가 시킬수 있는 것을 지켜려고 노력은 했어요. 하지만 포기한게 굉장이 많았죠. 불합리한 것들, 물건이 사라지면 훔쳐야하고 밖에 있었더라면 절대로 안햇을 일들인데 군대에서는 모두했고. 어쨌던 사회에서 자유롭게 살던 인간들을 아무런 보상도 주지않고 그냥 끌어 모아 논 곳이잖아요. 그것을 그냥 지나쳐 왔다는 것은 저한테는 엄청난 후퇴죠.
이 : 그런데 선민의식이나 이런게 깨지게 되었나요?
최 : 그렇죠. 내가 후퇴했으니까. 군대에서 나는 후퇴한 상태로 살아가고, 어찌되었던 이 안에서 살아가는 거잖아요. 그런데 내가 문제제기를 하면 내가 영창에 들어가야 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내스스로에 대해 알게되는 거잖아요. 내가 대학교 때 친구들에게 동기들에게 막대놓고 삿대질하고 욕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잃을게 없었기 때문이죠. 제가 잃을 거라고는 동기들과의 관계 밖에 업는데 나에게는 하나도 소중하지 않았던 것이고 친구들과의 관계 때문에 힘들어서 대학교를 그만 둔다하더라도, 만화학과이니 대학교을 굳이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죠. 대학 졸업장도 사실 저에게는 꼭 지켜야할 무언가는 아니란 말이죠. 그러니까 나는 이런 것들을 잃는 다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상황이라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우월감에 젖어서 사람들에게 막 말을 할 수 있어던 거죠. 그런데 군대에서는 내가 뭔가를 하면 바로 잃을게 생기잖아요. 그러니까 안하는 거죠. 거기서는. 훨씬 더 후퇴된 기준을 가지고 움직이는 거죠. 그래서 내가 옳아서 옳은 일을 한게 아니라 해도 안다칠만 하니까 한거구나 하는 것을 그 때 느낀거죠.
이 : 그런데 그런 생각을 가지면서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인내심인가요?, 아니면 그 생활에 완전히 적응한 걸까요? 뭘까요?
최 : 그 때부터 유머 감각이 생긴 것 같아요. 허허. 그러니까 그때부터 농담을 시작하게 된거죠. 스스로를 비웃고 하면서 조금더 객관화 시켜서 받아들이는 거죠. 감내하면서.
이 : 그러면 야한 이야기도 많이 알겠어요, 유머도 그렇고
최 : 야한 유머는 거의 안해요.
이 : 군대에서 사람들이나 고참에게 야한 이야기 해주고 하지 않았어요?
최 : 글쎄요. 그림은 그려준 적 있는데 제가 원래 성적인 농담은 못해요. 재능이 없어요. 입담이 좋아아하고 욕 같은 것도 잘해야하는데 그런 쪽으로는 소질이 없습니다. 그전까지는 대단히 딱딱하고 인간미 없는 인간이었다면 군대 경험이 그동안 내가 경멸했던 사람들과 다를게 없는 사람이구나, 약간의 위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다를게 없다는 것을 그 때부터 느끼기 시작한거죠. 그렇다고해서 계속 고통스러워하며 살수는 없잖아요. 그렇다고 내가 경멸했던 사람들과 똑 같이 살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러다보니 여러 가지 모순들을 가지고 살고 작품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유머감각이 필수적인 것 같더라구요.
이 : 군대에서도 만화 좀 그리셨어요?
최 : 군대에서는 그림은 많이 그렸죠. 만화는 못그렸고. 그림 때문에 나름 편했던 것도 있었죠. 불편햇던 것도 있고.
이 : 불편한 것은 뭐가 불편했어요?
최 : 한겨울에 훈련하다가도 어디 그림이 필요하다하면 새벽에 일어나 달려가서 촉박한 시간동안 그림을 그려놓고 다시 훈련에 참여하곤 했었거든요.
이: 어디에서 근무했어요?
최 : 대구요.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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