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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내가 만난 사람들

송곳의 최규석 작가(3)

오늘은 어제보다 2022. 8. 28.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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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석 작가 인터뷰
일시: 2016. 4.11
이-이종명/ 최-최규석 작가


이 : 아~ 송곳을 새로운 100도씨로 보시는 건가요? 보완적인 의미라고 말씀하신 것이 이런 의미인가요? 혹시 작가님이 생각하는 민주주의에 대해 한마디 하신다면? 87년을 보고서.

최 : 강화된 민주주의.

이 : 강화된 민주주의론

최 : 지금 전세계적으로도 그렇겠지만 민주주의가 한계에 봉착했다라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한계에 봉착했다 라면 뭘 할 거냐 하면서 대안들이 나오고 민주주의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움직임도 있고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집에 지붕에 비가 세면은 집을 나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잖아요, 집을 고쳐야 하잖아요. 우리의 민주주의가 무슨 문제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애초에 가지고 있던 민주주의의 이상이 실현되지 않는 것인가 그것을 봐야죠. 어떤 구조를 취하면은 사람들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이 되면서 정의로운 결과들이 이 틀 속에서 만들어질 것이냐 이런 것을 계속 연구를 하고 논의를 하고 해야 하는데 잘 안하는 것 같아요.

이: 저는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민주주의를 생각할 때 87년과 지금을 비교해보면 그 때보다 지금이 더 많이 모이고, 그 때보다 사람들이 더 많이 깨었고, 그 때는 사람들이 중졸,고졸이었다면 지금은 대부분 대졸,대학원졸이고, 더 많이 알거고 더 많이 깨어있고 더 많이 사람들이 모이고 투쟁도 더 극단적이고 열심히하고 그런데 그 때보다 자유롭지 못하고 희망이 안보이고 이런게 우리만의 문제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최: 우리 사회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민주주의가 정착된 이후에 들어나는 공통된 문제인 것 같아요. 포스트 민주주의 이런 책 같은 것을 봐도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것 같아요. 저도 87년 이전보다 지금이 더 정의로운 사회라고 생각을 하고요. 시민들 중에 다수가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시절에는 제도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도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선한의지라던가 열정으로 보완이 되는데 그게 정착이되고 열정의 시기가 지나고 나면 사람들이 잊지 않습니까?,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고 그 사람들에게는 디폴트 값으로 시작되는 거죠.

이: 그렇죠. 그게 기본이 되어버리니까.

최 : 제도이외의 열정을 사람들에게 요구하기가 힘들어지죠.

이 : 습지생태 보고서 보니까 너무 웃긴 내용들 많던데 여기서 나오는 용어들 술집 이런 것은 실제로 경험하신 건가요?

최 : 노래주점 알바는 좀 했었지요. 여기나오는 사건을 꼭 경험한 것은 아니구요. 습지생태보고서에서 하고 싶었던 것은 사람들이 살면서 다들 느끼는 감정들인데 이름이 안 붙여진 감정들이 되게 많아요. 여기 제일 처음에 나오지 만은 ‘의태’라고 있죠? 자기의 곤궁한 삶에 대해 불만없이 잘 살다가도 자기가 잘사는 사람, 자기가 아닌 잘나가는 사람처럼 보여 질 수 있는 기회가 오면은 그것을 움켜잡는 다는 것이죠. 그런 경우들은 사람들에게 아주 많거든요. 가령 나에게 유명한 친구가 있다 그러면 유명한 친구가 길을 걸어갈 때 느끼는 으쓱함이라 던 가 이런 종류의 감각들이 있어요. 이름이 없어요. 이런 감정들은. 그런 종류의 감정들만 끌어모아가지고 책 하나를 만들어 볼까 이런 생각에서 했었죠. 감정은 내가 겪은 감정이지만 사건은 다시 독자들에게 구현시키기 위해서 사건은 재구성하는 거죠. 만들어내고.

이: 보면서 공감됐던 것 중에 하나가 내가 80만원을 받고있는 활동가인데 해고된 사람이 있는데 노조에서 200만원을 대주는 거예요. 항상 밥 먹을 때 보면은 해고자는 예외, 밥 값도 예외 이런 것을 보면. 하하하~ 한 친구가 그렇게 나오더라구요.

최 : 하하하~

이 : 아~ 정말 똑 같은 거야. 80만원 받는데 밥값내고, 200만원은 해고자라고 밥값도 안내고 항상 예외야. 난 정말 이런 게 다 있나 생각들 때가 있는데. 그런 건 어떻게 그리게 되었나요?

최 : 운동권 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박탈감 이런 것도 모든 사회에서 모든 개인들이 똑 같이 느끼는 거죠. 상황만 좀 달라진다 뿐이지 읍하다고 느끼는 것이고. 서사 작품을 한다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각자의 삶에서 느꼈을 만한 감정을 전혀 다른 사건에다 집어 넣어가지고 그 사건을 애해하게 만드는 것 이게 바로 서사 장르의 핵심이라고 보거든요. 사람들이 전혀 살아보지 못한 어떤 시대의 영웅들의 이야기를 보면서도 공감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 사람의 경험을 하기 때문에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자기 삶의 어느순간 느꼈던 감정들이라는 것이지요. 영웅은 천하를 좌지우지할 고민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고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선택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고 있지만 이 고통의 종류는 같은 거거든요.

이 : 힘들기도 거의 비슷할 거예요.

최 : 선택지 앞에서 느끼는 인간의 고립감, 외로움 이런 것은 똑 같다 말이죠. 그런식으로 만들어 내는 거죠.

이 : 자취했던 친구들과 나중에 보면 교수님의 작업실이 있던 광덕산으로 들어가는데.

최 : 광덕산 아세요?

이 : 천안에 있는 것 아니예요?

최 : 예.

이 : 예 알지요. 그 절에 호두나무로 유명한 절이 있는데.

최 : 광덕사가 있지요.

이 : 광덕사.

최 : 도올 김명옥이 스님생활을 좀 했었다던.

이: 그래서 그 호두나무가 우리나라 최초의 호두나무라는 이야기가 있더라구요. 외래종 호두나무가 들어온 것은 광덕사가 처음이래요. 역사기행으로 다녀온 적이 있거든요.

최 : 제가 살 던 교수님의 아뜰리에 바로 앞에도 이만한 호두나무가 있었어요.

이 : 광덕산에서는 얼마나 살았어요?

최 : 몇 달 못살았어요. 등하교 시간이 하루에 너뎃 시간이 되버리니까.

이 : 자전거는 어떻게 되었나요?

최 : 자전거는 이사갈 때 일단 용달에다 실어서 갔죠. 그런데 자전거를 타고 갈수 있는 길이 아니예요. 후배녀석이 놀러왔다가 자전거타고 내려갔다가 두고 왔더라구요. 도저히 못올라오겠더라는 거죠.

이 : 그러면 작업실이라는 곳이 생활공간이긴해도 자주 들어가지는 못했겠어요. 밖에서 잔날이 더 많았겠어요.

최 : 한번 내려오면은 이삼일 친구 자취방을 전전하다가 다시 들어가고, 주말에 들어가서 자고 그런 식으로 살았죠.

이 : 이 때가 군대가기 전인가요?

최 : 네

이 : 그리고 잡지사에다가 출품하고.

최 : 출품하기 전이죠.

이 : 이 때는 작품으로 낸 것을 없었던 거예요?

최 : 그 때는 대학들어가서 바쁘기도 했죠. 처음에 대학 들어가서는 학생회도 하고 공부하랴 이것저것 하느라고 많이 바빴죠.

이 : 학생회는 학생운동 같은 것도 같이 했나요?
최 : 아니요. 비권이었어요. 학생회 할동만 한거죠. 그때는 운동권이 있었다하더라도 운동을 안했을 거예요.

이 : 그 때가 몇 년도에요?

최 : 96학번이니까. 96년,97년. 연대사태가 아마 대학교 1학년때 터졋을 거예요.

이 : 말씀하시는거나 사고를 보면 학생운동 열심했을 것 같기도 한데.

최 : 아니요, 그 때는 저는 굉장히 보주적인 사람이었어요. 보수주의라기 보다는 극단적인 자유주의였던 것 같아요. 무정부주의에 가까운 자유주의죠.

이 : ‘솔잎’을 제가 못봤는데 그게 어떤 내용인가요?

최 : 그것은 시간 개념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의 이야기죠. 신석시대 배경인데 이 때 사람들은 제사를 지내야만 해가 뜬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고 있고 그 믿을 이용해서 제사장이 권력을 독점하는 상황인데 제사장의 막내아들, 애가 똘똘한거죠. 이과 머리가 있는 거예요. 해가 움직이는 속도 늘 같다라는 것을 실험을 통해 밝혀 낸거죠. 그림자가 이동하는 것을 매일매일 기록하고 물발울이 떨어지는 숫자랑 이동거리를 매일매일 기록해서 알아내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엄청 반가운거예요. 더 이상 고생해서 제사 안지내도 된다는 말을 하는데 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그런 이야기예요.

이 : 꼭 한번 찾아봐야겠는데요. 그리고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도 제가 못봤어요.

최 : 공룡둘리에 그 작품이 들어있어요. 공룡둘 리가 단편집이고 제가 대학교 다니면서 대학교 졸업하고나서 1년까지의 작품이 다 묶여있는 화재 모음집이라 할 수 있죠.

이 : ‘송곳’ 연재해 왔는제 잠깐 쉬고 계신데 언제까지 연재되나요? 기간적으로 보면.

최 : 올해 끝나죠. 한번 더하면, 그러니까 5부가 끝입니다.

이 : ‘송곳’은 이미 인기도 있고 내용도 다 알고 해서 어려움이 있나요? 오랫동안 쉬는 이유는 뭥예요?

최 : 어려움이 있죠. 사람들이 내용을 대충 알기 때문에 놀래켜줘야 하는데 이런 게 없지 않습니까. 보통때 할 때는 내가 이렇게 하면 깜짝 놀라겠지 하는게 있었거든요.

이 : 유명해지면서 언론에도 다 알려져있고.

최 : 유명한게 문제가 아니라 드라마가 먼저 나가다보니까. 물론 디테일한 부분은 많이 다르겠지만 작품의 굵직굵직한 흐름은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 같으니까 그리는 재미가 좀 줄었죠. 이 : 어록 같은게 참 재미있고 좋았었는데 앞으로도 계속나오나요?

최 : 아니요, 어록은 대부분 구고신에게서 나오는 어록인데 구고신이 시들어가고 있는 중이라서 구고신이 그렇게 멋진말을 뱉을 그런 일이 없죠. 대신에 구고신이 했던 말이 뒤집어지는, 어록이라는게 제가 진보의 언어를 축약해서 만들어놓은 말들이잖아요. 그런데 이 언어들이 자기를 공격하는 말이 또 되잖아요? 그런 현상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거죠. 구고신의 멋져보였던 말들이 이제는 더러워지겠죠. 그 말이 다르게 적용될 때는 더러운 말이 되겠죠. 똑 같은 말이. 그런거를 그려볼라구요.

이 : 지금까지 만든 만화중에 가장 많이 팔린게 송곳인가요?

최 : 어~ 앞으로도 그럴 것 같기도 한데 현재까지 거의 비슷비슷한거 같아요. 물론 폭발적으로 팔리기는 했죠.

이 : 세권이니까 더 비싸게 팔리지 않았을까요?

최 : 물론 그건 그렇죠. 각 권당 팔린 부스로 보면 거의 비슷비슷한 것 같아요. 세권이 한꺼번에 나오니까 세배로 벌은 거죠.

이 : 수입은 고생한 만큼 더 많았겠어요?

최 : 예, 드러마 판권도 있고, 영화판권도 있고 했으니까 수익면에서는 이게 제일 나았죠. 대신 시간도 제일 많이 썼죠.

이 : 결혼하신지는 얼마되는 거예요?

최 : 좀 됐습니다. 아이는 유치원 이번에 들어갔어요.

이 : ‘대한민국 원주민’에서 보면은 아버지의 과거가 조금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표현이 있던데 기억하세요? 아버지의 연애사 같은 이런 이야기가 한두게 나왔는데 혹시 본인은 이런 연애사가 좀 있는지?

최 : 저도 뭐 몇 개있죠. 몇 개 잇는데 연애를 별로 안해봤어요. 저도.

이 : 아내에게도 알리고, 아내에게 숨기는 연애사가 좀 있나요?

최 : 굳이 숨기지도 않는데 굳이 알리지도 않죠.

이 : 서로 궁금해 하지 않나요?

최 : 서로 그런 것에 대해서는 전혀 궁금해하지 않아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일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상상가능하기 때문에, 둘다 젊어서 인기가 있었던 사람들이나 보니까 하하하~

이 : 끊임없이 자신감이 넘치시네. 하하하~ 야행성이라고 하셨는데 아까보니까 4시에 출근하시는 것 같던데 4시에 출근하면 몇시에 주무세요?

최 : 연재할 때는 거의 오전에 잤었죠. 아홉시 정도.

이 : 하루 일과를 좀 이야기해주시면?

최 : 일과라는게 거의 없습니다. 점심때쯤 일어나서 밥먹고, 원래 애가 유치원가기 전에는 애랑 좀 놀다가 오후 네다섯정도 출근해가지고 그 때부터 아침 일곱시까지 일을 하고 퇴근하는 거죠.

이 : 사시는데가 부천인가요?

최 : 네.

이 : 언제, 왜 부천으로 오셨어요?

최 : 서른 살에 온 것 같은데. 대학을 천안에서 다니고 졸업하고 서울 애니메이션센터를 갔어요. 대학 졸업할 때 손에 돈 30만원 있었거든요. 갈데가 없는거죠.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애니메이션센터에 제작 지원실이 있다해서 신청을 했죠. 센터되기 전까지는 수원에 있는 재개발 예정 아파트 비어있는 집을 어떻게 아는 사람 집이 있어가지고 거기가서 몇 달 살다가 애니메이션센터로 갔는데 원래 2년 계약이예요. 2년동안은 가서 살수 있겟다 했는데 한 1년 살아보니까 돈이 한푼도 없는 거예요. 거기에다 전세금이라는 게 상당히 비싸더라구요. 대학다닐 때는 전혀 몰랐더든요. 알아본적도 없고.

이 : 그럼 대학 다닐 때는 월세로만 산건가요?

최 : 네. 다 월세예요. 그리고 애들이 많잖아요. 다섯명만 모이면 1인당 5만원만 내면은 웬만한 방은 다 갈 수 있어요. 25만원 정도면 그 때는 웬만한 방은 다 구할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주거에 대한 두려움이 대학교 다닐 때는 한번도 없었던 거예요. 방값이 얼마나 비싼지도 모르고 살았던거죠. 그런데 당장 대학교 졸업하고 흩어질 수 밖에 없잖아요. 그 때야 깨닫게 된거죠 사람이 살아가려면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을. 그래서 일년지나고 나서 공룡둘리도 내고 해서 유명해지는 했는데 돈은 한푼도 없더라구요.

이 : 유명한데 돈이 없어요?

최 : 그게 제일 끔찍한 일이죠. 돈없고 유명해지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거예요. 하하하~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 : 품위유지비도 들어야하는데.

최 : 인터뷰하러 카메라 들고 와서 깜짝 놀라는 거죠. 카메라를 어디에 깠다 데야할지 모르는 거죠. 난감해 하는 게 눈에 뻔히 보여요. 냄비가 방바닥에 널브러져있고 가구는 다 주워온 것 밖에 없고, 젊고 유능한 예술가의 작업실을 촬영하러 간다고 왓는데 개판인거죠.

이 : 그게 몇 년도 인가요?

최 : 그게 2003년도 정도 였어요. 둘리가 잡지에 실리고 그럴 때지만 그때는 고려만 받았으니까 고료로 90만원 받았죠. 그게 끝이예요. 잡지는 제 책이 아니니까. 잡지가 매진이되고 털레비젼에도 나오고 하는데 저한테 오는 돈은 없는 거죠. 만약에 그 단편을 지금처럼 싸이트에 올려서 유료화 했더라면은 그때 제가 은퇴하지 않았겠는가 . 하하하~ 그때 본 사람들이 10씩만 냈어도 아마 제가 바로 은퇴했을 겁니다. 바로. 만화 안그렸을 것 같아요. 유명한데 돈은 하나도 없는 상태로 일년이 간거죠. “야, 돈을 벌어야겠다, 큰일났다”는 생각으로 그만두고 센터그만두고 창원에 내려가서 미술학원 강사로 2년을 지낸거죠. 미술학원 강사하면서 습지생태보고서를 연재하고 그러고 나서 다시 올라 온거죠. 올라올때는 돈이 있긴 있었지만 서울에 갈 수 있는 돈은 아니고 부천에 오게된 거죠. 부천에 만화정보센터가 있었으니까 친한 만화가들이 부천에 몇 명 와있었어요. 그래서 아는 사람있는대로 가는 게 좋겠다 해서 부천에 오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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