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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엉클박의 시익는 마을

삶의 본때

오늘은 어제보다 2022. 12. 11.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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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본때>
                                      
​어머님, 백 세 가까이 곁에 계시다 아버님 옆에 가 묻히시고
김치수, 오래 누워 앓다 경기도 변두리로 가 잠들고
아내, 벼르고 벼르다 동창들과 제주도에 갔다.
늦설거지 끝내고
구닥다리 가방처럼 혼자 던져져 있는 가을밤,
베토벤의 마지막 4중주가 끝난다.
창을 열고 내다보니 달도 없다.
마른 잎이 허공에 몸 던지는 기척뿐, 소리도 없다.

외로움과 아예 연 끊고 살지 못할 바엔
외로움에게 덜미 잡히지 않게 몇 발짝 앞서 가거나
뒷골목으로 샐 수 있게 몇 걸음 뒤져 걷진 말자고
다짐하며 살아왔것다.

창밖으로 금 간 클랙슨 소리 하나 길게 지나가고
오토바이 하나 다급하게 달려가고
늦가을 밤 차고도 투명하게 고즈넉한 밤.

별말없이 고개 기울이고 돌고 있는 지구 한 귀퉁이에
아무렇게나 처박혔다 가리라는 느낌에 맥이 확 풀리거나
나이 생각지 않고 친구들이 막무가내로 세상 뜰 때
책장에서 꺼내 손바닥 따갑게 때리던 접이부채를 꺼내
이번에는 가슴을 되게 친다.
외로움과 외로움의 피붙이들 다 나오시라!

무엇이 건드렸지? 창밖에 달려 있는 잎새들의 낌새에
간신히 귀 붙이고 있던 마음의 밑동이 빠지고
등뼈 느낌으로 마음에 박혀 있던 삶의 본때가
몸 숨기다 들킨 짐승 소리를 낸다.

한창 때 원고와 편지를 몽땅 난로에 집어넣고 태운
외로움과 구별 안 되는 그리움과 맞닥뜨렸을 때 나온 소리,
'구별 안 될 땐 외로움으로 그리움을 물리친다!'
몸에 불이 댕겨진 글씨들이 난로 속을 뛰어다니다
자신들을 없는 것으로 바꾸며 낸 소리.

/// 황동규 <연옥의 봄>

——
구닥다리 가방처럼 혼자 던져져 있는 가을밤
별말 없이 고개 기울이고 돌고 있는 지구 한 귀퉁이에
아무렇게나 쳐벅혀있다 가리라는 느낌에 맥이 확 풀려
접이 부채를 꺼내 가슴을 되게 친다

외로움과 아에 연 끊고 살지 못할 바에
외로움과 보폭 맞추어, 앞서지도 뒷 처지지도 말자고 !!
외로움과 구별 안되는 그리움과 맞닥뜨리면
외로움으로 그리움을 물리치라고!!
외로움곁에 사랑의 공터를 없애지 말라고!
사랑과 그리움과 외로움이 구별되지 안을 땐
몸 숨기다 들킨 짐승의 소리처럼
마음의 밑동을 빼버리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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