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마을은 해발 550미터의 산골이다. 울 마을 사람들은 찬바람부는 11월 중순부터 김장을 담기 시작한다. 나는 이웃집이 김장을 하는 11월부터 얻어먹기 시작했다. 올해도 11월초 앞집 할머니네 김장을 얻어 먹다가, 몇일 뒤엔 경기도 화성 지인을 만나 김장김치 한박스를 받아 열 댓명의 손님까지 치르며 맛있게 먹었다. 얼마 전 윗집이 김장을 해서 또 얻어다 먹었다. 어떤날은 김치만 네 종류를 꺼내 놓고 밥을 먹었다. 우리집 묵은 김장, 앞집 할머니네 김장, 경기도 화성 김장, 윗집김장 각각 지역색과 다른손맛에 따라 김장도 각양각색이다. 허옇지만 시원한 맛의 경기도 김장과 다른 전라도 풍의 우리집, 윗집김치 그리고 충청도와 부산풍의 앞집김치.
어제 우리집도 남도 바닷가로 가서 부모님과 막네 처제네와 함께 김장을 했다. 내가 도착하니 점심때가 조금 못미친 시간이었는데 노쇠하신 부모님께서 90%준비를 마쳐 놓으셨다. 이 모든걸 키우고 준비하시느라 몇일이나 애쓰셨을텐데 몸살 안나셨나 모를 일이다. 양념도 다 버무려 놓으셨고, 무, 배추도 다 절인후 물기를 빼놓으셨다. 우린 낙지탕탕과 굴회를 바탕으로 막걸리 한잔을 들이키며 김장담기전의 준비를 마쳤다. 식사 후 본격적으로 김장담기가 시작되었다. 어머님과 아내가 비비고 난 절인배추를 조달하고 무쳐진 김장을 박스와 통에 담았다. 오늘 담아야 할 김치량은 처형님네 20kg다섯박스, 처제네 세박스, 오빠네 한박스, 우리집 세박스, 처제네 세박스, 처제 시부모님 한박스, 처형님 시모님께 한박스, 부모님집에 네박스. 정말 어마무시한 양인데 매년 모여서 하다가 올핸 우리와 막네 처제네만 함께 하기로 했다. 거기에 결정적으로 막내 동서가 출근을 하는 바람에 가장 큰 일꾼도 없다. 그렇다보니 처음엔 속도가 나질 않았다. 그런만큼 난 편한 편이었다. 그러나 오후 두시반쯤 막내처제 내외가 도착하며 일이 속도가 붙길 시작했다. 한달뒤에 먹을 깍두기와 갓김치를 한박스씩 만들어 집집마다 분배해놓고 일반김치를 버무렸다. 마지막으로 굴을 넣어 즉시 먹을 김장을 버무려 마쳤다. 막내처제네 조카녀석도 버무리겠다고 손을 보타고, 무친 김치를 사이사이 맛있게 먹었다. 어쩜 어린아이가 김치를 저렇게 좋아하는지 신기할 뿐이다. 우리 김치는 늘 조미료 한알 넣지않고 모든 양념은 자연에서 조달한다. 그래서인까? 전라도풍의 붉은 양념과 젓갈맛, 그리고 깔끔한 맛이 특징이다.김장이 마무리되어갈 즈음, 티브이에선 특검과 탄핵투표가 진행되고 있었다. 서울 여의도엔 수십만명의 인파가 모여 탄핵을 외치고 특검을 외치고 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여당 국회의원들의 반대로 일말의 기대를 총칼로 무자르듯 모두 부결시켜 버렸다. 이렇게 허탈하고 억울할수가 있을까? 서울에 함께 못해 미안한 감정, 두표가 모자라 부결된 특검에 아쉽고 화가 나는 감정, 이 모든 분노를 억누르며 삶은수육에 김치를 싸서 함께 막걸리를 들이켰다. 세계적으로 보수주의를 넘어 국수주의가 판을치고, 민주주의의 파괴가 일어나고 있는 정세가 한국사회에선 더한 비상계엄이라는 불법과 반헌법으로 목도되고 있다. 헛헛한 가슴을 고작 이 막걸리로 달래야 하는가.... 김장이 가족에게 있어 올 한해의 숙제라면 탄핵은 올해 국가의 큰 숙제가 되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