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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사는 이야기/엉클박의 시익는 마을 (43)
산과물
목련후기 목련꽃 지는 모습 지저분하다고 말하지 말라 순백의 눈도 녹으면 질척거리는 것을 지는 모습까지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그대를 향한 사랑의 끝이 피는 꽃처럼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지는 동백처럼 일순간에 져버리는 순교를 바라는가, 아무래도 그렇게는 돌아서지 못 하겠다 구름에 달처럼은 가지말라 청춘이여 돌아보라 사람아! 없었으면 더욱 좋았을 기억의 비듬들이 타다남은 편지처럼 날린대서 미친 사랑의 증거가 저리 남았대서 두려운가, 사랑했으므로 사랑해버렸으므로 그대를 향해 품었던 분수같은 열정이 딱지처럼 엉켜서 상처로 기억되는 그런 사랑일지라도 낫지 않고 싶어라 이대로 한 열흘만이라도 더 앓고 싶어라. // 복효근 ………. 헤어질 일이 많아진다 헤어지는 일도 많다 헤어짐이 만남의 설레임처럼 아름답기를 바라지 ..
장난 꾸러기 그것은 새해의 폭발이었다. 무수한 사륜마차가 가로지르고, 장난감과 붕붕과자가 번쩍거리고, 탐욕과 절망이 들끓는 진흙과 눈의 혼돈, 가장 완강한 고독자의 뇌수마저 어지럽히려고 마련된 대도시의 공인된 착란. 이 소동과 난장판 한가운데서, 나귀 한 마리가 채찍으로 무장한 어느 무뢰한에게 시달리며 굳세게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나귀가 보도의 모퉁이를 막 돌려 할 때, 장갑이 끼워지고 에나멜 칠로 번들거리고, 넥타이로 끔찍하게 목이 조여, 완전 신품 양복속에 감금당한 멋쟁이 신사 하나가 이 누추한 짐승앞에 정중하게 절을 하고는, 모자를 벗어들고 말했다. “ 아름답고 복된 새해를 기원합니다 !” 그러고는 내 알 바 없는 떨거지들 쪽으로 득의 만만하게 고개를 돌렸다. 제 만족감에 그들이 칭찬이라도 얹어..
누구나 아는 슬픔 이렇게 될 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분명 내일 아침까지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쓰라림은 씻어 내지 못한다 슬픔은 아무런 이유없이 왔다 간다 우리는 공허함으로 가득찬다 우리는 아프지 않다. 그렇다고 건강한 것도 아니다. 마치 영혼이 편치 않은 것같다. 외톨이가 되고 싶기도 하고, 그러고 싶지 않기도 하다. 손을 들어 자신을 때리고 싶다. 거울 앞에서 생각한다. “ 이게 내 얼굴이야?” 이런 주름은 어떤 재단사라도 펴지 못할 것이다 어쩌다 기분이 이렇게 꼬였나? 갑자기 하늘의 별들이 주근깨로 보인다 우리는 아프지 않다, 마음의 상처를 느낄 뿐 어떤 일도 가능할 것 같지 않다. 떠나고 싶지만 숨을 곳을 찾지 못한다 무덤에 묻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디를 처다봐도 잘못한..
사라진 것들의 목록 골목이 사라졌다 골목 앞 라디오 수리점 사라지고 방범대원 딱딱이 소리 사라졌다 가로등 옆 육교 사라지고 파출소 뒷길 구멍가게 사라졌다 목화솜 타던 이불집 사라지고 서울 와서 늙은 목포댁 재봉틀 소리 사라졌다 마당 깊은 집 사라지고 가파른 언덕길도 사라졌다 돌아가는 삼각지 로터리가 사라지고 고전음악실 르네상스 사라지고 술집 석굴암이 사라졌다 귀거래다방 사라지고 동시상영관 아카데미하우스 사라졌다 문화책방 사라지고 굴레방다리 사라졌다 대한늬우스 사라지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광고도 사라졌다 사라진 것들이 왜 이리 많은지 오늘의 뒤켠으로 사라진 것들 거짓말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런데 왜 옛날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스며드는 것일까 어느 끈이 그렇게 길까 우린 언제를 위해 지금을 살고 있는..
종과 주인 낫 놓고 ㄱ 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목을 베어버리더라 바로 그 낫으로 //김남주 ——- 새로운 것은 외부로 부터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부터 나오는 것이다 명제( proposition)의 결함을 지적하려면 그것안으로 들어가서, 그것자체의 문제점을 지적해야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대립하는 것은 자본주의 안에서 맹아로서, 자본주의 내부로 부터 대립하는 것이다 내재적 비판 규정적 부정 부정의 부정 이 모든 서술과 개념과 철학을 응축한다 ‘ 바로 그 낫으로’ ‘ 종이 주인의 목을 베어버린다’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 부동산은 없고 아버님이 유산으로 내리신 동산(動産) 상자 한 달 만에 풀어보니 마주앙 백포도주 5병, 호주산 적포도주 1병, 안동소주 400㏄ 1병, 짐빔(Jeam Beam) 반 병, 품 좁은 가을꽃 무늬 셔츠 하나, 잿빛 양말 4켤레, 그리고 웃으시는 사진 한 장. 가족 모두 집 나간 오후 꼭 끼는 가을꽃 무늬 셔츠 입고 잿빛 양말 신고 답답해 전축마저 잠재우고 화분 느티가 다른 화분보다 이파리에 살짝 먼저 가을물 칠한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 실란(蘭) 꽃을 쳐다보며 앉아 있다. 조그맣고 투명한 개미 한 마리가 실란 줄기를 오르고 있다. 흔들리면 더 오를 생각 없는 듯 멈췄다가 다시 타기 시작한다. 흔들림, 멈춤, 또 흔들림, 멈춤 한참 후에야 꽃에 올랐다. 올라봐야 별 볼일..
어머님, 백 세 가까이 곁에 계시다 아버님 옆에 가 묻히시고 김치수, 오래 누워 앓다 경기도 변두리로 가 잠들고 아내, 벼르고 벼르다 동창들과 제주도에 갔다. 늦설거지 끝내고 구닥다리 가방처럼 혼자 던져져 있는 가을밤, 베토벤의 마지막 4중주가 끝난다. 창을 열고 내다보니 달도 없다. 마른 잎이 허공에 몸 던지는 기척뿐, 소리도 없다. 외로움과 아예 연 끊고 살지 못할 바엔 외로움에게 덜미 잡히지 않게 몇 발짝 앞서 가거나 뒷골목으로 샐 수 있게 몇 걸음 뒤져 걷진 말자고 다짐하며 살아왔것다. 창밖으로 금 간 클랙슨 소리 하나 길게 지나가고 오토바이 하나 다급하게 달려가고 늦가을 밤 차고도 투명하게 고즈넉한 밤. 별말없이 고개 기울이고 돌고 있는 지구 한 귀퉁이에 아무렇게나 처박혔다 가리라는..
명성과 영원 4. 존재라는 최고의 별! 영원의 조각을 새기는 문자판이여! 그대는 나에게 오는가—— 누구도 바라본 적이 없는 그대의 말없는 아름다움—— 어찌하여 그 아름다움은 내 눈길을 피하지 못하는가? 필연이라는 문장! 영원의 조각을 새기는 문자판이여! ——-그러나 그대는 알고 있으리라, 모든 사람들이 미워하고 나만이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그대가 영원하다는 것을, 그대가 필연이라는 것을! 나의 사랑은 필연에만 영원히 환희한다 필연의 문장! 존재라는 최고의 별이여! ——-어떤 소망도 이르지 못하고 어떤 부정도 더럽히지 못하는 것, 존재의 영원한 궁정이여, 영원히 나는 그대의 긍정이다 나는 그대, 오, 영원을 사랑하니까! …… ///프리드리히 니체 …….. 허무와 허전으로 속이 가..
여백 언덕위에 줄지워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나무 뒤에서 말없이 나무들을 받아 앉고 있는 여백때문이다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 하나하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 넉넉한 허공때문이다 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들의 균형 가장 자연스럽께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 일일이 쓰다듬어 주고 있는 빈 하늘때문이다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 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모르는 사람들은 ///도종환 ……… 나의 살아온 길과 세세한 일상 하나하나를 다 보여주는 여백, 나의 하늘을 둘러본다 내속의 여백에 어느 풍경을 담으려 하고 있을까? 그 여백의 평수는 얼마나 될까? 미풍과 솔향이 있는 산책하고 싶은 공간일까? 스모그에 보호되고 있는 강남..
악의 기원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아이들은 귀엽고 정직하며 선량하지만 어른들은 참아 줄 수가 없다 이 사실은 때때로 우리 모두의 기를 꺽는다 지금 악하고 추한 노인도 나무랄 때 없는 어린아이 였던 때가 있었던 것처럼 지금 친절하고 매력적인 아이도 훗날 덩치만 큰 비겁자가 될 수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파리의 날개를 뜯어내는 노는 것이 아이들의 참된 모습일까? 어린 시절에 이미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우리의 본성에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 악은 고칠 수 없고, 선은 어린 시절 죽는다 //에리히캐스트너 ……… 이것만은 분명하다 아이들은 감성으로 살지만 어른들은 이성으로 산다 그리고 그 이성은 많은 종류의 계산기로 힘을 발휘한다 이것만은 분명하다 아이들은 만남에 설..